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양한 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기르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군중 심리에 휩쓸리게 되면 사회의 지성을 기르는 지성인인 교사들조차 ‘덮어놓고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어떤 한 면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비난하기는 쉽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자주 규칙을 어기고 문제를 일으키며 교사에게 불손한 언행을 하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런 학생에 대하여 첫째, 보이는 행동과 나타나는 외연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다. 둘째, 우리 반 학생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다. 셋째, 무한한 사랑으로 이해하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든 그 학생의 외연만 보거나, 자신의 사랑에 심취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사실 가장 나쁜 것은 무시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바라보고 어떤 개선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다각도로,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현상도 그러한데 우주만큼 복잡한 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개선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그 세월 동안 겪어온 삶과, 그 속에서 구성해 온 사고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해한다거나, 개선을 요구한다거나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심지어 정신적인 병에 의한 것이라거나 선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우리는 ‘그래서 그랬구나’ 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 무언가를 바꾸기를 요구하거나 이해하려고 하거나 할 수 없다.
가끔 업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예의가 바르지 않다거나, 복잡한 일은 피해간다거나, 칼퇴근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가 붙는 동료 교사들이 보인다. 물론 나도 어디선가 그런 비판을 받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업무를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도, 예의가 바르지 않아 보이는 이유도, 복잡한 일을 사양하는 이유도, 칼퇴근을 하는 이유도 보일지 모른다. 그 이유가 저 무의식이라는 심연 밑바닥에 있으면 우리는 그 이유조차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세상의 많은 잘못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는 누구나 상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상식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상식이 없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어떤 계기로 인해 사고 방식이 다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린아이들을 보라. 바둑판과 바둑돌이 놓여 있으면, 바둑돌을 가지고 바둑을 두겠는가? 던지고 놀겠는가?
사회의 지성을 기르는 지성인으로서의 교사는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존재다. 다만 그것이 교사의 편협한 사고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과 관심. 그런 것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의식의 영역보다 무의식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바꾸는 방법은 간단하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에게 규칙을 지키게 하려면 규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눌 줄 모르는 아이에게 나누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배려도 받아봐야 할 줄 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해를 받아봐야 할 줄 안다. 칭찬도 많이 받은 사람이 잘한다. 멋있는 선생님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백 마디 말보다 효과가 크다.